작가글쓰기 - 경상북도영양교육지원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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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내용
제목
가을 산책
작성자
이동백
작성일
2009-10-27 오전 12:32:09
                              가을 산책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이다.

‘하늘을 좀 보아, 참 고혹적이지. 가을 하늘 같은 하루가 되기 바란다.’

학생들에게 이 말을 남기면서 수업을 마쳤다.

“선생님, ‘오메! 단풍 들것네’, 선생님 기분이 지금 꼭 그러시죠?”

교실을 나서는데, 한 녀석이 나를 향해 한 마디 하고 지나간다. 시인 영랑이 어느 가을에 느낀 그 기분을 내가 낚아챈 것을 이 녀석이 금방 또 앗아가고 만다.


하늘을 쳐다 보다 결국 옆자리의 선배님과 늦은 오후에 교문 밖 오솔길을 걸었다.

먼 산에서는 단풍이 산자락을 따라 내려오고, 길섶에는 구절초와 들국화가 피어 있다. 물기 하나 묻어 있지 아니한 가을 햇살이 꽃잎에 내려와 앉았다. 구절초의 하얀 잎새가 싸늘하게 보인다. 구절초 하얀 일파리가 청초하게 아름답다. 황국이 구절초의 흰 잎새에다 가을 냄새를 슬쩍슬쩍 뿌려 주고 있었다.

“가을 하늘 만큼이나 가을 들꽃이 곱지요?”

“곱습니다. 가을은 이토록 아름답게 깊어 가는데, 인간은 어찌하여 쓸쓸하게 늙어갑니까?”

무심결에 나온 나의 대답이었다. 지명(知命)의 나이쯤에는 그런 느낌 정도는 보통 가질 것이라며.

“채워지지 않은 것, 말하자면 그리움 같은 것이 마음에 들어 있어 쓸쓸한 게지요. 채워지지 않은 가슴을 두고 사는 일은 아름답습니다. 안타까워 할 일만은 아니지요.”

선배님의 한 마디가 나에겐 깨달음으로 와 닿는다. 그의 가르침이 가을 하늘보다 맑고 깊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우리가 가던 걸음을 멈춘 것은 해묵은 대추나무 밑이었다. 나무 밑에는 대추가 발갛게 떨어져 있었다. 몇 개를 주워서 나누어 먹었다.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상쾌하다. 대추의 맛이 혀끝에 와 닿는다. 달짝지근하면서 좀 쌉싸름하다.

“고놈 잘 익었네.”

“이 한 알을 위해 봄, 여름, 가을이 열심히 오고 또 갔겠지요?”

자연의 쉼 없는 수고로움이 없었던들 어찌 이 세상이 이렇게 풍성하고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가르치는 일도 이와 같지요. 선생의 노고가 없이는 학생의 장래는 없습니다. 결실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

‘敎不倦(교불권)’ 문득 이 글귀가 채찍처럼 머리에 와 박힌다. 우리 교무실 벽에 걸린 편액에 쓰인 말이다. ‘가르침에 게으르지 말라.’ 선생들에게는 무서운 말이다.

“부끄럽습니다.”

“자연의 섭리 없이 세상도 없고, 교육도 없지요.”

대추는 나무 주위를 돌아가며 떨어져 있었다. 나무에 달린 것들은 아직 푸른빛이  도는데, 떨어진 것들은 죄다 붉었다. 자연은 익으면 저렇게 곱게 떨어지고 마는가 보다. 내 익었노라 하늘에다 대고 자신을 뽐내기도 할 만한데 말이다. 떨어져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다음 세대를 위해 즐거이 썩어 주는 것이다. 인간도 익으면 저렇게 떨어져야 하는가?


자연이 주는 은총을 깊은숨으로 깊이 들이마시면서 풀섶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들녘 하나를 가로질러 버렸다.

교문으로 들어서니, 70명 남짓한 전교생에 비해서는 무척이나 넓은 운동장에는 무리를 지어 학생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수업을 끝낸 아이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한 바탕 공차기에 신명을 풀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녀석은 헛발질을 해대고도 씩씩할 뿐이다. 또 어떤 녀석은 고함을 지르면서 공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고함에 학교가 저르르 떨리었다.

“나라 안 학생들이 온통 공부로 야단들인데, 공이나 차고 있으면 어쩌지요?”

내가 학생들을 걱정하고 나서자, 선배님은,

“보기 좋은데 뭘요. 지금 우리 사회는 공부라는 망령에 마구 휘둘리고 있어요. 집단 히스테리증에 오염돼 있다 이 말입니다. 공부는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단호하게 내 말의 허리를 잘라 버리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열심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용맹정진, 때로는 몇 날의 밤을 세워가며 공부를 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공부함에는 신명이 있어야 하고, 공부는 물 흐르듯이 해 나가야 한다. 이런 것이 건강한 교육이다. 그의 교육론에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한 가르침과 건강한 배움이 있음으로써 세상은 아름답고, 살맛이 나는 법이란 말이지요.”

공을 잡고 상대편으로 향해 질주하던 녀석이,

“선생님, 가을 하늘 같은 하루가 되셨나요?”

하면서 공을 하늘로 뻥 차 올렸다. 보름달 하나가 느닷없이 하늘에 떠올랐다. 꿈처럼.

 

<이 글 또한 수비 시절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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